서울 남산 자락. 일요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데 곳곳이 러너들로 붐빈다. 평소라면 한산할 주차장이 만차다. 자동차 사이로 형광 러닝화를 신은 이들이 몸을 풀고 있다. 2030세대가 주도하는 러닝 열풍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하나의 문화가 됐다.
달리기는 가장 보편적이고 단순한 운동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헬스장보다 러닝이 더 성취감이 커요. 기록이 늘어날 때마다 성장하는 기분이 들어요.” 직장인 이지훈 씨(31)는 주 3회 이상 한강에서 러닝을 한다. 2030세대에게 러닝은 ‘자기 관리’이자 ‘자기 표현’의 도구다. SNS에는 ‘런스타그램(런+인스타그램)’ 인증샷이 쏟아지고, 러닝 기록 앱을 통한 경쟁과 마라톤 대회 참가 인증이 곧 자기 브랜딩이 된다.
매출이 말해주는 러닝 파워
러닝 인구 증가는 곧 시장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현대백화점은 올해 1~8월 러닝용품 매출이 전년 대비 30% 성장했고, 신세계백화점은 32.1% 늘었다. 러닝화는 초보자용에서 고가 전문 모델까지 다양하다. “10km 돌파 기념 러닝화”처럼 성취감에 맞춘 구매도 흔하다. 의류, 스마트워치, 액세서리까지 소비가 번지면서 러닝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가 됐다.
러닝 동호회 + 디지털 서비스 = 거대한 커뮤니티
2030세대의 러닝은 개인 운동이면서 동시에 커뮤니티 활동이다. 러닝 크루는 일종의 사회적 네트워크 역할을 한다. “퇴근 후 같이 달리자”는 모임에서 연애와 인맥이 형성되기도 한다. 업계도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카카오는 지난 7월 ‘러너스 카드’를 출시했다. 마라톤 이력과 기록을 인증해주는 디지털 카드다. 향후 주요 대회 선등록 혜택과 제휴 브랜드 할인까지 연계할 계획이다. 스포츠 브랜드들도 각종 러닝 크루를 운영한다. 단순히 제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달리는 경험”을 팔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러닝 특화 서비스도 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문을 연 운동화 대여소는 하루 3천 원만 내면 운동화와 의류를 빌려 경복궁·광화문 일대를 달릴 수 있다. 관광과 러닝을 결합한 형태다. 한강 주변, 남산 자락에는 샤워 시설을 갖춘 러닝 스테이션도 등장했다. 집에서 운동하기 어려운 직장인, 외국인 관광객, 출퇴근길 러너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꼴불견 러너들 때문에…” 불편 호소도
하지만 열풍이 커지면서 부작용도 나타난다. 남산과 한강, 경복궁 인근을 찾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러너 때문에 산책길이 불편하다”는 불만이 나온다. 특히 단체 러닝 크루가 길을 가로막거나, 보행자를 밀치듯 지나가는 행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전거 도로에서 속도를 내는 러너, 신호등을 무시하고 도로를 가로지르는 러너도 문제다. SNS에는 “러너들이 자기만 운동하는 줄 안다”, “밤 러닝하면서 고성방가하는 팀 때문에 못 잤다”는 글도 올라온다. 심지어 일부는 상업적 이벤트성 크루 활동으로 일반 시민 공간을 독점해 ‘러닝 꼴불견’ 논란을 키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러닝 문화가 성숙하려면 러너 스스로 기본적인 매너와 안전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잡음에도 불구하고 러닝 시장의 성장은 계속된다. 업계는 가을 시즌을 ‘러닝 대목’으로 보고, 신제품과 체험 이벤트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매출을 끌어올리려는 전략이다.
러닝은 트렌드를 넘어 도시 문화로
2030세대의 러닝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 자기계발, 관계 확장, 소비 활동을 모두 담아낸다. 그러나 동시에 “함께 쓰는 공간에서의 배려”라는 과제도 남겨두고 있다.
남산의 만차 주차장, 한강의 붐비는 러너들, SNS 속 런스타그램은 그 변화를 잘 보여준다. 러닝은 분명 도심 문화를 바꾸고 있지만, 그것이 긍정적 열풍으로 남을지, 불편한 갈등으로 번질지는 결국 러너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